한국적 내러티브로 가구 만들기, 양태오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미학을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재해석해온 양태오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널리 호평받았다.지난해 론칭한 가구 브랜드 ‘이스턴에디션’의 제품은 지금껏 디자인한 공간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미학을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재해석해온 양태오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널리 호평받았다. 그런 그가 최근 가구, 향수 등 다양한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론칭한 가구 브랜드 ‘이스턴에디션’의 제품은 지금껏 디자인한 공간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국내에서는 공간 디자이너가 가구 브랜드까지 론칭하는 경우가 드물다.
공간만으로 태오양 스튜디오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늘 생각했다. 공간 디자인은 기획부터 시공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게 우선인 만큼 스튜디오의 색깔과 지향점을 온전히 드러내기도 어렵다. 디자이너가 자기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당장 구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에 비해 가구는 공간의 톤앤매너를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고, 공간에 비해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시간이나 비용도 적게 드는 편이다. 평소 공간 디자인 과정에서 가구도 함께 디자인하며 재미를 느꼈기에 브랜드까지 론칭하게 됐다.
이스턴에디션의 디자인은 조선 후기 미학인 ‘무미無美’에 기반한다.
무미의 미학은 아름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무작위 혹은 무기교의 미, 장식을 배제한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공간 디자인을 하다 보면 온갖 호화로운 장식과 각종 미술 사조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나를 가장 마음 편하게 만드는 것은 무미였다. 브랜드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는 무미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는 디자인을 선보였지만, 솔직히 앞으로는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스턴에디션은 동양의 아름다운 미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내러티브를 소비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만든 브랜드이기 때문에 굳이 무미의 미학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구 디자인에서 내러티브를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스턴에디션뿐 아니라 모든 가구를 디자인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다. 사용자에게 어떤 이야기와 철학을 전달할지 고민하는 것에서 디자인을 시작한다. 형태에서 시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스턴에디션의 방석 스툴을 예로 들면, 좌식에서 입식으로 변화한 한국인의 삶 속에 방석을 어떻게 적용시킬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우리 선조들에게 방석이란 손님을 맞이할 때 필요한 환대와 접객의 상징이자 자기 수양의 플랫폼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를 현대적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재발견하는 과정에서 2개의 방석을 겹치고 다리를 달아 스툴로 만들었다. 이처럼 기존 가구가 지닌 내러티브를 극대화하고 오늘날의 관점으로 표현하는 것이 태오양 스튜디오만의 디자인 방식이다. 우리가 디자인한 모든 가구에는 고유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소재 선정 단계에서는 어떤 고민을 하나?
일단 너무 어려운 소재는 배제하려고 한다. 여기서 ‘어려운 소재’는 전위적인 신소재나 공간에 어울리기 어려운 색의 소재, 복잡다단한 공정을 거쳐야 하거나 특별한 제작 기술을 요하는 소재 등을 의미한다. 요즘 디자이너들의 가구나 오브제를 보면 마치 예술 조각품처럼 아우라를 뿜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 지점에서 가구를 만든다. 어떻게 하면 가구가 공간에 길들여질 수 있을지, 공간의 기존 질서를 깨지 않고 조용히 자리해 자기 역할을 할지를 많이 고민한다. 이스턴에디션도 나무와 화강암 등 자연 소재의 물성을 바탕으로 진중하고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소재 자체는 무난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퀄리티까지 무난하지는 않다. 최고의 재료와 이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제작자들이 협업하기 때문에 묵직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이스턴에디션 제작 과정에 인사동의 고가구 수리 장인들이 참여한다고 들었다.
평소 고미술 컬렉팅을 하기 때문에 인사동에 장인이 많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일전에 이스라이브러리 관련 전시를 준비하며 협업한 적도 있었고. 그래서 가구 디자인 과정에서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 축적해온 그들의 노하우를 활용해 고가구 제작 기법을 이스턴에디션에 반영했다. 장인들은 주로 제작과 생산 과정에서 자문 역할을 한다. 직접 제작하는 작은 소반이나 소품 등은 한정판으로 판매하고 있다.
토끼소주, 헤리터 등과 협업했다. 협업 브랜드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나?
이스턴에디션의 톤앤매너를 해치지 않고 진정성 있는 내러티브를 선보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또 타 브랜드와 협업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례로 토끼소주는 영역은 다르지만 한국적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지향점이 맞닿아 있다. 주방 가구 브랜드 헤리터는 장인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한국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하는 데 능숙하다. 우리 브랜드에 없는 주방 가구 분야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협업을 결정했다. 현재 청담동 플래그십 스토어 1층에서는 헤리터, 2층에서는 이스턴에디션 가구를 선보이고 있다.
브랜드 론칭 이전에도 직접 가구를 디자인한 공간 프로젝트가 여러 번 화제가 됐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역사관과 신라미술관 두 곳의 로비 레노베이션 작업을 한 뒤에 특히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삼국시대의 신라 유물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굽다리 접시와 토기를 로비 한가운데 진열장 없이 전시했고, 천장에는 별처럼 떨어지는 조명을 달았다. 신라역사관의 약사여래불상 앞에 가구를 배치하는 작업에도 의미를 담았다.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부처인 약사여래를 바라봤을 신라인의 마음을 불상과 가구 사이 거리를 조절해 표현하고자 했다. 너무 멀면 감흥이 없을 테고, 너무 가까우면 위압감을 느낄 테니 말이다. 불상이 자신을 품어주는 듯한 느낌을 현대인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지금은 기성 가구가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구상했던 가구 배치가 상당 부분 흐트러졌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에는 관람객과 공간 사이의 감성적인 접점을 연출하기 위해 가구 디자인과 배치에 신경을 많이 썼다.
가구를 디자인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능이 기본이다. 공간에 맞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사용자에게 편안한 디자인이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에 가구를 위한 내러티브와 철학이 담기면 좋은 가구라고 생각한다. 2020년 작업한 국제갤러리 더 레스토랑이 대표적이다. 제일 돋보여야 하는 것은 벽면에 배치된 예술 작품이었기에 가구는 최대한 색상과 장식을 배제했다. 방문객 수와 스케일감이 가장 잘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고려해 그에 알맞은 가구를 디자인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동양 철학을 계속 공부하면서 아카이브화한 뒤, 그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일 예정이다. 해외 진출도 본격적으로 준비 중이다. 지난 10월 파리에 이스턴에디션 쇼룸을 오픈했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이스턴에디션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사업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내러티브의 확장이라 생각한다. 한국적인 내러티브가 미국과 유럽의 철학·사상·공간과 만나면 어떤 시너지가 탄생할지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