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인테리어를 개척한 디자이너 장응복

직물이란 재료를 바탕으로 1990년대에 국내 디스플레이 디자인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장응복. 텍스타일 디자인이라는 평면 작업을 넘어 이를 공간화하는 입체 작업까지 영역을 확장한 그녀는 스스로를 소프트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정의 내린다.

소프트 인테리어를 개척한 디자이너 장응복

직물이란 재료를 바탕으로 1990년대에 국내 디스플레이 디자인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장응복. 텍스타일 디자인이라는 평면 작업을 넘어 이를 공간화하는 입체 작업까지 영역을 확장한 그녀는 스스로를 소프트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정의 내린다. 무엇보다 그녀가 디자인한 직물에는 한국적 미감이 담겨 있다. 한국의 민화,건축,자연현상 등에서 건져 올린 한국의 미를 그녀만의 무늬로 치환하는 장응복은 국내의 독보적인 직물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할아버지가 한학자셨고, 한옥에서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내 어린 시절을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인터뷰하면서 떠올리는 거예요. 그게 나한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 안 저 깊숙이 그때의 정서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내 이름도 ‘응할 응(應)’에 ‘복 복(福)’ 자를 써서 ‘복에 응하다’라는 굉장히 특이한 이름입니다. 영변 태생인 아버지가 월남하면서 남쪽에 친인척이 없다 보니 어머니의 먼 친척인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어요. 할머니를 여의고 혼자 지내셨거든요. 한학자셨던 그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아홉 칸 성북동 집에서 여러 가족이 모여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종로에서 태어나셨는데 나 역시 그랬습니다. 순 서울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 레트로한 삶을 그 지역에서 겪은 거죠.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부암동에서 다시 느꼈습니다.

요즘이야 우리 것에 대한 다시 보기를 하며 가치 찾기를 하는 시대이지만 선생님이 유년 시절을 겪었던 1960~70년대는 새것을 좋아하던 시기 아닌가요?

플라스틱 바가지를 덤으로 받으려고 미원을 보따리로 사고 나일론을 굉장히 신기해하던 시기죠. 나도 어린 시절에는 플라스틱 굽 달린 슬리퍼가 어찌나 갖고 싶었던지 엄마가 사주지 않아 애가 닳기도 했어요.(웃음) 우리 가족은 금사로 용·학·봉황 무늬를 수놓은 자카드(복잡한 문양이 있는 천)에 빳빳하게 풀 먹인 홑청을 꿰맨 침구를 사용했습니다. 아직도 제가 풀 먹인 빳빳한 침구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1986년 모노컬렉션을 설립했을 때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졸업하자마자 청와대에 가구를 납품하는 회사에 취직해 매일 무궁화를 몇백 개씩 그렸습니다. 이게 아니다 싶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 간부가 일하던 텍스타일 회사에 들어갔지요. 일본 사람에게 염색을 배운 실무자에게 돈을 주고 따로 과외를 받기도 했습니다. 텍스타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그러던 중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스물여섯에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나 혼자라도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아 사회생활 3년 만에 모노컬렉션을 설립하고 초창기에는 건축가와 함께 인테리어 디자인을 주로 했습니다. 지금 모노컬렉션이 생산하는 직물의 스케일이 다른 건 공간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어 무작정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지요. 1990년대 중·후반에 국내 디스플레이 디자인 시장을 꿰찰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내게 패브릭이란 재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원단 시장의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20년 넘게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한국의 원단 시장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텍스타일 디자이너는 많아도 모노컬렉션처럼 자체 디자인으로 장기간 명맥을 유지하는 회사가 없습니다.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모노컬렉션도 일하기 어려운 환경인 거죠.경쟁 상대가 없다는 건 시장 자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지금도 그런 어려움을 떠안고 있지만 그나마 긍정적인 건 디자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향상됐다는 겁니다. 기업이 특별 이벤트로 선물로 제공하는 상품이나 한국을 홍보하는 제품을 많이 디자인하고 있어요. 거기에서 얻은 수익을 계속 텍스타일 디자인에 쏟아붓는 이유는 직물 디자인으로 어느 정도 비즈니스 궤도에 오르는 게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직물 디자이너로 비즈니스를 하려면 단색이나 패턴이 강하지 않은 원단을 색깔별로 찍어 파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직물 디자이너는 색을 쓰는 걸 두려워하고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외국 브랜드에 대한 콤플렉스도 심하고요.

모노컬렉션을 유명하게 만든 대표 작업을 알려주세요.

1997년 대우건설과 함께 베트남 하노이 호텔을 진행했습니다. 만약 대우가 부도나지 않았다면 그 이후로 더 많은 작업을 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불가리아, 중국 연길 등지에서 진행한 해외 공사를 통해 생산 현장을 체험했습니다. 해외 건축가와 교류하며 인맥도 넓혔지요. 비즈니스 감각을 키우면서 디자이너의 시각을 넘어 다른 시야를 갖게 된 좋은 기회였습니다.

지난해 CJ 오쇼핑과 홈쇼핑 홈 인테리어 브랜드 ‘복(Bogg)’을 출시했습니다. 첫 방송에서 제품이 40분 만에 매진됐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CJ 오쇼핑과 어떻게 함께하게 됐나요?

내가 CJ 오쇼핑에서 나오는 잡지 <세크레토>와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 담당 기자가 MD에게 귀띔을 해줬대요. 홈쇼핑이라면 갈 곳 없는 디자이너가 마지막에 가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CJ 오쇼핑 관계자를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CJ 오쇼핑에서 나를 연구한 백과사전 두께의 보고서를 가져왔는데 슬쩍 보고 그냥 잊어버렸을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 제안서를 가져왔을 때도 일체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홈쇼핑은 백화점처럼 업체가 직납한 물건을 판매해 판매 수수료를 챙기는 시스템인데, 이번 계기로 CJ 오쇼핑이 브랜딩을 하고 광고 기획, 상품에 대한 모든 것을 나의 검토 아래 진행한다는 조건이라면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CJ 오쇼핑이 따로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해도 되고, 모노컬렉션의 세컨드 브랜드 복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도 좋다고 했더니 일사천리로 CJ 오쇼핑의 새로운 브랜드 복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복은 매출 목표를 훌쩍 뛰어넘는 150% 신장을 기록했습니다. 올해는 200% 매출을 늘리는 게 목표입니다. 해외 출시도 계획 중이고, 커튼 등 상품군을 늘려 출시할 예정입니다.

‘복’은 모노컬렉션의 세컨 브랜드가 아니라 CJ 오쇼핑의 브랜드인 거네요.

모노컬렉션의 세컨드 라인으로 시작한 브랜드 복을 CJ 오쇼핑에 양도 했으니 그건 엄연히 CJ 오쇼핑의 브랜드입니다. 내가 브랜드 복을 직접 운영했다면 이만한 매출을 올리지 못했을 거예요. 대량생산에 대한 로망으로 전문 경영인을 영입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잘 압니다. 나는 브랜드 복을 디자인 컨설팅하지만 방송이나 운영 같은 부분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간에는 새로운 형태이자 장응복만의 방식으로 전반적인 기획이나 홍보물 등 큰 아우트라인은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창의적인 디자인을 수작업 방식으로 추구하는 모노컬렉션이 그대로 대량생산으로 이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고의 노력으로 만든 데이터가 대량생산을 통해 고객에게 극대화된 공감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점이 홈쇼핑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CJ 오쇼핑 브랜드 복은 수공예로 구현한 패치워크를 인쇄로 보여주니 가격이 저렴합니다. 핸드메이드를 대량생산해 보여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모노컬렉션 마니아 중에는 홈쇼핑에서의 가격을 보고 놀라는 사람도 있어요. 실제 복 상품을 사용한 다음에 저렴한 가격으로 또 다른 상품 가치를 누린다면 그것이 대량생산의 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격은 제품의 가치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소비 심리를 복이 건드린 거죠. 복을 구입하면서 모노컬렉션에도 오시는 분이 계시니까요. 40~50대뿐만 아니라 20~30대 마니아층까지 형성된 상태입니다.

앞으로 CJ 오쇼핑과 비즈니스 협력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 계획인가요?

2013년까지 CJ 오쇼핑과 계약했습니다. 복 라벨을 제작할 때 ‘디자인 바이 장응복’을 넣자고 하는데 거절했어요. 내가 아니라 다른 디자이너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건 CJ 오쇼핑의 선택입니다. 복은 CJ 오쇼핑 소속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에서 내가 올가미를 씌우고 싶지 않아요. 내부에서 자발적이지 않을 때는 결코 잘되지 않으니까요.

지난 1월에 열린 세계 최대의 인테리어 전시회 메종 & 오브제 파리에 참여해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CJ 오쇼핑에서 이번 전시를 지원해 참여했습니다. 전시장에 모노컬렉션과 복의 영상 2개를 나란히 돌렸습니다. 한 디자이너가 만들어 비슷한 색깔이지만 가치는 분명 다릅니다.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 사람 역시 관심이 많았어요. 이런 정서를 외국인이 처음 봤으니까요. 인도와 영국 등에도 패치워크가 있지만 모노컬렉션의 패치워크는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느낌인 거죠.

디자이너 개인의 힘으로 산업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CJ 오쇼핑과 좋은 결과를 보고 있는데, 모노컬렉션을 기업의 부티크 브랜드처럼 운영할 계획은 없나요?

나는 디자이너로서 다른 브랜드와 자유롭게 일하고 싶습니다. 프랑스의 감성적인 가구 브랜드 로셰 보부아(Roche Bobois)와 협업한 것처럼요. 가구도, 옷도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 브랜드가 기업에 소속되면 어느 부분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급 브랜드인 모노컬렉션과 대중적인 복은 타깃이 다릅니다. 디자인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를 것 같습니다.

나는 크리에이티브한 욕구가 있는 하이엔드를 겨냥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모노컬렉션 청담동 매장을 정리하면서 20년 동안 하지 않은 세일을 했는데 하루 만에 엄청난 매출을 올렸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커튼을 붙잡고 싸우는 광경까지 봤어요. 그때 모노컬렉션이 비싸서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품질을 유지하며 가격을 낮추기엔 모노컬렉션이라는 조직이 부족했습니다. 2006년 내가 가졌던 환상이 바로 전문 경영인을 영입해 회사를 키우는 거였죠. 전문 경영인이 회사 규모를 확장할 때 수입과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인풋 없이 아웃풋만 늘였습니다. 회사는 10개월 만에 마이너스 재정 상태가 되었습니다. 모든 걸 경영인에게 일임하다 보니 내가 생각하지 못한 상황까지 다다른 겁니다. 보통 디자인과 경영을 분리하고 싶어 하지만 내 경험상 디자이너는 회사 경영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디자이너가 마케팅과 영업에 관여해야만 시장이 원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홈쇼핑은 다릅니다. 소량 생산 중심의 크리에이티브한 일에 몰두했던 내게 대량생산으로 얼마큼의 원가 절감이 가능한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대량생산을 통한 품질 향상, 물량 대비 원가 절감, 이것이 바로 CJ 오쇼핑이 가진 힘입니다. 대량생산을 통해 저가로 만든 제품이 가격 대비 70~80%의 만족도를 준다면 그 역시 좋은 제품입니다. 고가의 고급 제품뿐만 아니라 대량생산 제품에서도 최고의 감도를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기도 하고요.

직물은 완제품이 아니라 원단이기 때문에 브랜드화하는 데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부티크 형식의 디자이너 브랜드를 운영하려면 충분한 자본도 필요하고요.

해외 시장과 연결되면 국내에서도 브랜드를 운영하는 게 가능합니다. 1차 상품인 원단이 나왔을 때 이를 잘 편집하는 훌륭한 디자이너가 많아야 시장이 활발해집니다. 한국에 있는 디자이너는 상류층 눈치 보기 바쁘기 때문에 편집 능력을 보여주는 디자이너가 없습니다. 대기업 디자이너는 더더욱 심하죠. 우리나라 디자인 교육의 문제입니다. 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도 한국에 들어오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전에 익히고 배운 것을 포기해요. 한국에는 에디터, 즉 디자이너가 없습니다. 내가 디자인한 원단으로 내가 기대하지 못한 방식을 보여줄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흔하지 않죠.

대표님에게는 ‘한국적 미감을 가진 디자이너’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수출용 오리엔탈리즘이 필요한 시기도 있었다’는 말도 서슴지 않으셨는데요.

1995년 이전에는 디자인에 대한 고민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모네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고객이 카피를 요구하는데 그것만은 도저히 못 하겠더군요. 그래서 고객이 원하는 분위기를 대략 내며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내 아이덴티티를 고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외 프로젝트를 하면서 외국 건축가나 디자이너를 만날 때 나도 모르게 위축되었어요. 장응복의 아이덴티티가 없으니까요. 나의 디자인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2000년 푸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하임텍스타일(Heimtexti)전시에 나갔을 때 외국인이 인정해준
건 확실하게 한국적인 색을 보여주는 디자인이었습니다. 내가 무언가 흉내 낸 건 쳐다보지도 않아요. 어떤 면에서 수출용 오리엔탈리즘은 단기간에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 용이한 수단일 수 있습니다. 한국적인 느낌을 리비아 색채로 풀어내면 잘 팔려요. 하지만 한 번은 그렇게 성공할 수 있어도 롱런하는 명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소품을 만들더라도 마찬가지예요. 열쇠 고리 ‘리버피쉬(Riverfish)’는 작아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물건입니다. 그 작은 물건 안에 패치워크된 많은 패턴에서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가 보여준 한국의 미는 이조백자, 소반에서도 느껴집니다. 그 아름다움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내뱉었을 때 그게 진짜 한국적인 겁니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종이에 민감한 것처럼 패브릭 디자이너라면 실크, 리넨 같은 원단에 예민합니다. 원단을 고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나요?

나는 사실 원단이 더 이상 원단이 아니라고 이야기한 지 오래됐어요. 종이나 나무, 철 모두 원단이 될 수 있습니다. 종이와 직물이 만나 또 다른 재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물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요.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은 물성에 대한 색다른 방향을 오히려 내게 제시해주기도 했습니다. 경이로운 경험이지요.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찢는 것도 문양이 될 수 있습니다.염려되는 점이 있다면 다양한 디지털 기술이 노리는 검증되지 않은 디자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한국 민화에서 디자인 영감을 많이 얻으신다고 하셨습니다.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학습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일 쉬운 민화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전에는 조선 후기 골동품이 내 취향에 맞았어요. 사실 끌려서 이런 것을 찾아 나선 거지 내가 한국적 디자인을 하겠노라는 의지에서 출발한 게 아닙니다. 당시 ‘한국적 디자인’이라는 단어에는 뼈가 있었습니다. 아방가르드하고 어렵고 색이 강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오래 꾸준히 하다 보니 이제는 긍정적으로 봐주고 있지요. 사실 나의 디자인이 그 시절보다 깊어지기도 했고요. 정선의 그림에 있는 구름을 재디자인한 패턴도 있고, 소반의 부서진 다리 부분만을 크게 확대한 패턴도 있습니다. 소반의 다리는 한국적이지만 기왓장처럼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소재지요. 꽃신 패턴 같은 경우는 윤석남 선생님의 설치 작업에서 영감받았습니다. 그분의 작업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패턴화했지요. 그분의 무한한 에너지가 이 작업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평면화된 패턴 작업에서도 그 에너지가 느껴지는 겁니다. 건축, 민예품, 자연현상 등에서 한국적 미감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은데,그중 민화가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사실입니다. 어딘가 어눌한 아름다움이 좋아요.

우리 고유의 정서를 문양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시는데 일본, 중국과 다른 우리의 정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국 다완을 보면 불완전한데 다른 나라는 완벽하게 동그랗습니다. 좌우 대칭이 확실하죠. 이는 한국의 민족성과도 연관이 깊습니다. 불완전한 게 우리 고유의 정서입니다. ‘여백의 미’라는 것 자체가 꽉 차지 않았다는 뜻으로 부족함을 추구하는 겁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이를 잘 정리해야 합니다. 한식집에 중국식 문짝을 달고, 중국 인형을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하는 건 모두 역사 의식의 부재 때문에 발생하는 아이러니입니다.

모노컬렉션은 다양한 리빙용품과 결합된 제품을 많이 선보였습니다. 좌식이 아닌 입식 생활에 우리의 고유 패턴을 적용하는 건 어떻게 다른가요?

현대 생활에 맞는 구조에 따라 가구 스케일이 달라집니다. 패턴 역시 공간과 접목되는 스케일에 맞춥니다. 옷을 만드느냐 커튼을 만드느냐에 따라 원단과 문양이 달라집니다. 또한 나는 사용자의 편의대로 쉽게 그 쓰임의 형태가 가변화되는 모듈를 기본으로 합니다.

선생님은 공간을 잘 이해하는 직물 디자이너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스스로 ‘소프트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정의하셨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메종 & 오브제 파리를 통해 고정된 오브제가 아닌 가변적 오브제로 인테리어를 한다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이런 개념을 적용해 쉽게 바뀌면서 가볍고 부드러운 재료를 찾았습니다. 물론 폐기물과 폐휴지도 최소화되어야겠죠. 원단이 이에 적합한 소재였습니다. 직물은 한옥의 문풍지처럼 빛과 소통하며 쉽게 교체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물성이 단단한 소재보다도 폐기물량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소비자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재사용도 가능하고요.

사진이나 브로슈어는 결국 소비자가 만나는 1차적인 시각 이미지인데, 모노컬렉션에서 나오는 사진이나 브로슈어를 보면 선생님이 관여를 많이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족 없이 단순한 게 좋아요. 기교와 설정 없는 사진을 추구합니다. 실제 제품의 형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사진 기술로 사실과 다른 형상을 보여주는 것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재현할 수는 있겠지만 어찌 보면 거짓말이니까요. 정직한 표현이 좋습니다. 촬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빛인데,

빛의 시간대를 잘 이용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노출 부족으로 보이겠지만 난 그 시간을 선택합니다. 어두울 때, 밝을 때, 아주 땡볕에 찍을 때 그때마다 도드라지는 부분이 달라요. 기다리며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2010년 부암동에서 과천으로 스튜디오를 옮겼습니다. 이리 멀리 이사 간 이유가 있나요?

20년 넘게 논현동이라는 도심지 한복판에서 일하다가 2007년 부암동으로 옮겼습니다. 산속에 있는 부암동은 비즈니스에는 불편할지언정 서울에서 1950년대를 간직한 유일한 지역입니다. 한국 예술의 역사와 기가 결집된 중심지이죠. 내 안을 다시 살피는 여유를 가진 시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디자인 영감과 기운을 얻었습니다. 부암동에 있는 동안 두 번 전시회를 열었는데 스튜디오 공간이 작업하기에 좀 좁았어요. 부암동으로 옮긴 지 4년 만에 또 옮기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어쨌든 내가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지난 1년은 거의 밤낮 없이,쉬는 날 없이 일했어요.그간 외주를 주거나 직원에게 시켜 한 일까지 직접 했습니다. 포토샵도 과외로 배워 직접 했고요. 드로잉도 하고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적절한 사용이 이 스튜디오에서 내가 풀어야 할 가장 큰 문제입니다. 혹자는 내가 예술가인지 디자이너인지 혼란스러워하는데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나는 직물 디자인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텍스타일 디자이너 장응복으로서 무엇을 할 건지가 중요하죠. 나는 공간을 기본으로 하되 생활과 관련이 깊은 디자인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 것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이 지금의 스튜디오 형태입니다.

인간에게 직물 디자인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궁극적으로 직물은 사람을 위한 겁니다. 외부 자극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지요. 이불을 덮었을 때, 혹은 옷을 입었을 때 엄마 피부에 닿은것같은안도감이생깁니다.직물이주는심리적치유효과가 분명 있어요. 차가운 콘크리트 공간에 굳이 색색의 페인트를 칠하지 않아도 커튼 하나 드리우는 것으로 충분히 사람에게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앞으로 선생님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지난 10년간 디자이너로서 많은 고뇌와 변화가 있었습니다. 다양한 매체와 작가와 협업하고 교류하면서 이를 실현하고 연구하는 과정이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방향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부단히 연구하고 기쁘게 작업하는 과정을 통해 차근차근 가려고 합니다. 큰 목표를 세우기보다 여행하듯이 일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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