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사 보넷의 시티 스페이스 City Space

파리에서 펼쳐지는 도시 감정의 연극

5월 23일부터 7월 26일까지 파리 마레지구에 위치한 사진 전문 갤러리 ‘라 갤러리 루즈La Galerie Rouge’에서는 클라리사 보넷의 유럽 첫번째 개인전 ‘시티 스페이스City Space’가 열린다.

클라리사 보넷의 시티 스페이스 City Space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가 클라리사 보넷Clarissa Bonet은 거리에서 포착한 순간들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며 사진의 경계를 확장 중에 있다. 도시가 가진 질서, 반복, 소외, 고립, 익명성을 주제로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넘나드는 독특한 미학이 그녀의 작품 속에 존재한다.

5월 23일부터 7월 26일까지 파리 마레지구에 위치한 사진 전문 갤러리 ‘라 갤러리 루즈La Galerie Rouge’에서는 클라리사 보넷의 유럽 첫번째 개인전 ‘시티 스페이스City Space’가 열린다. 작가가 지난 10여 년간 전개해 온 시리즈 ‘시티 스페이스’의 주요작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도심 속 인간과 주변 환경 사이의 감정적 거리감을 탐색하는 섬세한 시도로 현대 도시의 구조적 현실과 도시인의 내면적 심리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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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plex (2019)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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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impse (2019)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플로리다에서 태어나 플로리다 중부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한 클라리사 보넷은 이후 시카고의 컬럼비아 칼리지에서 순수예술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시카고에 정착한다. 그리고 2011년부터 시작한 ‘시티 스페이스’ 연작을 통해 미국 사진계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하셀블라드 그랑프리 수상(2019)과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American Portraiture Today’ 전시에 초청되는 등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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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리사 보넷 © Clarissa Bonet

보넷의 작업은 전통적인 거리 사진의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사진의 내부 구조는 완전히 연출되고 통제된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순간적인 관찰에 의존하지 않고 기억과 드로잉, 공간 분석을 거쳐 인물과 장소, 그리고 빛을 하나의 장면으로 편집해낸다. 거리에서 본 장면을 실제로 재현하기 위해 모델을 섭외하고, 특정한 시간의 자연광을 계산해 로케이션을 결정하며, 장면을 무대처럼 연출한 후 촬영을 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거리 사진이 가진 우연성과 일회성에서 탈피한 조형적 완성도와 극적 긴장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사진은 회화와 건축, 연극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시 속 인간의 감정 상태를 조용하게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사진은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라는 독특한 미학적 지점을 점유하고 있으며 도시라는 공간이 단지 배경이 아닌 주체적 이미지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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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tress (2016)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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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ximity (2014)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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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Private Space (2019)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우리가 매일 오가는 도시는 사실상 무대이며, 우리는 그 위를 걷는 배우이자 관객입니다.
길거리에서 스쳐간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면 저는 그것을 ‘재현’해야만 해요.
실제로 그 장소에 다시 가서, 원하는 시간대의 빛이 들기를 기다리고, 필요한 인물과 연출을 조직해요.
저는 사진을 찍기 전에 먼저 하나의 시각적 구조를 ‘설계’하죠.

Clarissa 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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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ythm of the Street (2017)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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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ace to Perch (2021)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보넷의 사진 속 인물은 대개 정지해 있고, 얼굴이 보이지 않거나 등지고 있다. 군중은 없다. 대신 콘크리트 벽이나 계단, 그림자의 윤곽, 고층 건물의 입면이 장면을 지배한다. 인물은 구조물에 압도되며, 공간 속에 흡수된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도시의 감정 구조를 대변하는 조형적 장치처럼 보인다. 이러한 구성은 도시 특유의 익명성, 고립감, 그리고 정서적 거리감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동시에 인물의 시선과 몸짓, 그림자와 간격의 정밀한 조율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장면에 감정을 투사하게 만든다. 보넷의 사진은 말하지 않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그 정지된 인물들을 통해 우리 내면의 고요함 또는 침묵의 기억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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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ught In the Storm (2011)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도시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놀라울 만큼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구조이기도 해요.
특히 현대 도시는 관계보다 규칙이 우선시되고, 그런 환경 속에서 인간은 존재감이 흐려지죠.
저는 사진 안에서 그 감각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Clarissa 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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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ulation (2019)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클라리사 보넷의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빛’이다. 그녀는 자연광을 이용하지만, 그것을 철저히 계산된 도구로 사용한다. 특히 직사광선의 활용이 그러한데 건물 벽에 그림자를 만들고, 인물의 일부만을 밝히며 장면의 정서를 분할하는 훌륭한 역할을 한다. 빛은 사진 속에서 방향을 정해주는 동시에 감정의 밀도를 조절하는 메타포인 것이다. 날카로운 햇빛이 바닥의 일부분만을 비추고 인물이 그 빛의 가장자리에 걸쳐 있는 작품 Calculation (2019), 건물의 경계에서 멈춰 선 인물을 직사광선이 포착하며 도시 구조와 심리적 경계 사이의 긴장감을 시각화하고 있는 On the Edge (2015)처럼 빛은 물리적 공간을 감정적 구조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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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Edge (2015)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빛 다음으로 다른 중요한 요소를 뽑자면 ‘도시’가 아닐까. 그녀가 정한 도시 속 장소가 하나의 ‘심리적 세트’가 되어 영화적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작가는 내러티브를 배제하고 있다. 그녀의 사진은 사건이 아닌 감정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아니라 상태를 포착하는 목적성은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 ‘무엇을 느끼는가’에 집중하게 만든다. 볼드한 건축적 요소는 공간을 정의하고 그 속에 담긴 인물의 자세와 위치, 그림자의 흐름이 심리를 암시한다. 작가가 선택한 장소는 대개 일상적이다. 어느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진 안에서는 일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이는 도시라는 공간이 의식적인 연출과 빛의 개입을 통해 감정의 무대로 변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동시에 사진이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고 감각화하는 매체임을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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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rogress (2016)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사진은 그 자체로도 현실을 보여주지만, 저는 그 현실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익숙하게 지나치는 거리, 평범한 계단이나 벽을 감정적으로 읽을 수 있는 구조로 바꾸는 것이 제 작업의 핵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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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jectory (2018) © Clarissa Bonet_Courtesy La Galerie Rouge

이번 파리 ‘라 갤러리 루즈’ 전시는 클라리사 보넷의 작업이 시카고라는 도시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도시 감각’의 언어임을 보여준다. 파리라는 도시는 시카고와는 많이 다르지만 도시라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감정 구조는 충분히 유사하지 않을까? 마레 지구의 조용한 골목과 역사적인 건축물, 부드러운 자연광은 보넷의 직선적이고 현대적인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면서도 그녀의 사진이 담고 있는 고요한 정서를 더욱 선명히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특히 갤러리의 흰 벽과 자연광이 드는 공간에 놓인 작품들은 외부와 조화를 보여주면서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사진 속 거리와 그림자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느낌이다. 파리라는 새로운 장소와 배경이 새로운 독해의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결국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시각적 기록을 ‘시티 스페이스’에서 찾을 수 있다.

Information
클라리사 보넷의 개인전 <시티 스페이스 City Space>​
기간 2025.05.23 – 07.26
주소 라 갤러리 루즈La Galerie Rouge (3 Rue du Pont Louis-Philippe, 75004 Paris, 프랑스)
운영 시간 수-토요일 11:00-19:00(일,월, 화요일 휴관)
웹사이트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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